이재오 검증 – 옥중서신(아들 민호에게)
<우리 봄을 기다리며 살자>
사랑하는 아들 민호야!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서리가 하얗게 내렸더구나. 서리란 무엇인지 글방 선생님에게 물어 보렴.
민호가 아침에 동네 글방에 갈 때 마당에 있는 꽃나무들 위에 하얗게 이끼처럼 덮여 있는 것 있지. 길가에도, 지붕에도 담 위에도 있지. 겨울이 되면 공중에 있는 공기와 땅위에 있는 공기의 온도 차이로 순간적으로 얼어버리는 기운이 있는데 그것이 서리라는 거야. 그 서리가 많이 내릴수록 날씨가 추운 겨울임을 말하는 거지.
아버지가 민호만큼 쪼꼬만 할 때 그 추운 겨울 서리를 밝으면서 손을 호호 불며 십리나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단다. 서리가 하얗게 오는 날은 집에서 학교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뛰어갔지.
그래서 아버지는 뛰기를 아주 잘 한단다.
사랑하는 아들 민호야. 안양에 와서는 아직 너를 못 보았구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때 집에 가려고 했는데 아마 잘 안될 것 같구나.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라일락 나무에 꽃망울이 돋는 봄이 와야 갈 것 같구나. 민호야.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단다. 이 추운 겨울만 보내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는 봄이 오면 꽃 냄새와 함께 아버지가 민호 곁으로 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100밤 정도 자면 된단다.
아주 사랑하는 민호야. 아버지가 있는 창 밖에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백일홍 같은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에 잎이 피면 민호 곁으로 가게 되겠거니 하고, 벌써부터 하루에도 몇 번 그 나무를 쳐다본단다. 민호야. 우리 봄을 기다리면서 살자. 안녕
1989년 12월 4일 흐림
안양시 호계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