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검증 – 옥중서신(딸 고은에게)
<예술을 도피처로 삼지 말아야>
사랑하는 딸 고은에게!
고은아!
그간 잘 지냈느냐? 화실을 옮기고 나서 더 많은 정진이 있는지 궁금하구나.
요즈음 생각해보니, 네가 아주 꼬마였을 때, 아마 네 살인가 할 때 대구에 가서 돌아가신 대구 할아버지 앞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아주 근사하게 그렸던 것 같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그 그림을 놓고 아주 자랑이 대단하시던 그런 기억이 나는구나. 네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오랫동안 투옥 생활의 연속이라 너의 재주를 초등학교 때부터 못 살려 준 것이 지금은 무척 후회가 되는구나.
아버지는 네가 클수록 너에 대한 기대를 법학이나 인문과학을 해서 법관이나 학자가 되는 길을 가주었으면 하였단다. 그것은 아버지가 하려고 했다가 못 한 아쉬움에 네게 기대해 본 것인 것 같구나.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가 꼭 너의 적성이나 너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맞다고만 볼 수가 없지. 그래서 나는 네가 미술을 생명처럼 아끼고, 열성적으로 하겠다는 그 각오를 한편 장하게 생각한다.
다만 걱정은 우리 사회의 병적 현상에서 돈 있는 집 아이들이 공부는 못하고, 대학은 가야겠기에 건방 떠느라고 미술이나 음악이나 무용을 택하는 것을 종종 보아 왔기 때문에 너도 혹시 그런 것에 물들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고은아! 우리 집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구든지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매번 감옥에 들어오는 생활이다. 내 자식이라고 해서 안타까운 것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한 사회제도에 영합할 생각은 없다.
소질과 능력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가 되어버리는 사회는 꼭 고쳐져야 한다.
고은아! 굳은 의지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해라.
아버지가 있는 방에는 오늘 아침에 얼음이 얼었구나.
그럼, 안녕!
1989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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