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수필
길 병 곤
자유기고가,소설가
나를 쓸쓸하게 하는 것들 50
산골 오두막 댓돌 위에 얹힌 뒤축이 꿰매어진 검정 고무신 한 컬레.
허물어져 가는 빈 토담집의 퇴색된 빗살 창문.
옛 성벽 사이에 낀 무성한 이끼.
가을밤 애수를 자아내는 돌 틈 귀뚜라미의 처량한 울음소리.
감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마지막 감 하나.
기차가 출발한 직후 썰렁한 시골 간이역.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기적(汽笛)의 울림.
눈보라 치는 나루터에 묶인 사공 없는 나룻배.
뱃고동 울리며 떠나는 막배 후미의 소용돌이치는 물거품.
인적이 끊긴 밤 선창가의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깜박이는 낡은 가로등.
2층 베란다에서 쓸쓸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강아지의 두 눈동자.
창가에 홀로 앉아 활짝 핀 백목련을 바라보는 노처녀.
고요한 창가에서 단풍이 곱게 물든 정원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늙은 홀아비.
양로원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깡마른 노인의 우울한 눈빛과 떨리는 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여인.
먼지 수북한 빈 우편함.
출가한 딸이 거처했던 방에 남은 빈 책상, 빈 꽃병, 빈 옷걸이, 빈 액자.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미풍에 나부끼는 12월 달력 한 장.
장거리 여행 후 귀가 했을 때 떠날 때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집안 풍경.
파티가 끝난 직후 어수선한 탁자와 바닥에 흩어진 삼페인 코르크 마개들.
방금 세상을 뜬 환자의 머리맡에 놓인 갈피끈이 중간에서 멈춘 책과 돋보기 안경.
임종을 앞둔 환자 곁에서 창가를 응시하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가족.
쓰러져 깨지고 이끼가 무성하게 낀 비석(碑石)에 쓰인 알 수 없는 희미한 글자들.
묘지 앞 제단에 놓인 바싹 말라 비틀어진 오래된 국화 한 송이.
다비식이 끝난 직후 텅 빈 연화대.
깨진 유리창 틈으로 떠나가는 라라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지바고의 애처로운 눈길.
유배지로 떠나는 죄인의 움푹 들어간 눈매.
외딴 간이역에서 혼자 플랫폼을 빠져나오는 중년 여인의 손에 들린 커다란 가방.
짝사랑 한 연인이 이민 갔다는 소식을 듣고 울적한 심사에 빠진 노총각.
리어왕의 말년을 닮은 종묘 공원의 버림받은 아버지들.
줄지어 멀리 사라지는 한 무리의 기러기 떼.
멀리서 들리는 어미 찾는 새끼 염소의 애달픈 울음소리.
나뭇가지에 허술하게 달라붙어 덜렁거리는 텅 빈 작은 새 둥지.
초겨울 앙상한 가지에 초췌한 몰골로 앉아 있는 까마귀 한 마리.
빈집 마당에 무성한 잡초, 빈 외양간, 빈 돼지우리, 빈 닭장.
폐쇄된 겨울 바닷가 횟집의 헝클어진 의자들과 내려앉은 간판.
뒷골목에 방치된 부서진 포장마차.
빈 벤치 위에 흩어진 낙엽들과 함께 나뒹구는 일회용 빈 컵 한 개.
늦가을 호두알이 프라스틱 차양(遮陽)에 ‘딱’하고 떨어져 대굴대굴 굴러가는 소리.
축제일에 초대받지 못한 노총각, 노처녀, 홀아비, 과부.
공연 없는 야외 공연장 무대의 텅 빈 객석.
심야에 손님 끊어진 식당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주방장.
파장(罷場)된 어물가게 좌판에 홀로 남은 못생긴 아귀 한 마리.
해 질 녘 혼자 골목길을 종종걸음 치는 어린아이.
깊은 밤 점점 멀어져 가는 여인의 또박또박 하이힐 굽 소리.
반송된 우편물에 '주소불명' 이라고 찍힌 스탬프.
정다운 이웃 블로거의 불로그 폐쇄.
다정했던 벗이 보낸 절교(絶交) 메시지.
시(詩)제목: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단어: 허무(虛無), 무상(無常), 절교(絶交), 이별(離別). 사망(死亡).
나를 쓸쓸하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런 것들 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