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 1996~2000) 의원평가 1위를 차지한 초선 이재오
이재오의 새로운 정치는 초선 때부터 맹랑하게 시작되었다. 이재오가 국회의원이 처음 되던 해 그는 정말 굴욕적인 일을 겪었다. 새벽에 원내총무가 불러서 나갔더니 관광차에 실어서 어디론가 데려갔다고 했다. 관광차도 전부 천으로 가려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고, 내려서 봤더니 국회 회의장 이였단다. 그리고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정부가 제출한 ‘노동법’ 날치기(96.12.26)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재오는 불가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절차로 진행된 행위에 대한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껴 가슴에 달린 금배지를 떼어 집어던졌다. 그 후로 10년간 한 번도 배지를 달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97년 당시만 해도 일반 초선의원이라면 정부와 당지도부의 결정에 ‘열불’이 나도 참아야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재오는 의원총회에서 노동부 장관과 청와대 수석을 향해 “왜 이들이 경질되지 않았냐”고 직격탄을 날리며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후에도 한보사태의 철저한 규명과 관련인사 문책론 등의 분명한 소리를 내고 여권의 독선적 권력운용 방식에서 벗어나 정치의 중심을 국회의사당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이재오발 ‘정풍운동’이다.
대여투쟁에 있어서도 이재오는 늘 선봉에 서 있었다. 김대중 정권의 김종필 총리 인선을 통한 권력야합시도를 무산시킨 사람이 이재오다. 그는 이외에도 국회 529호사건, 고관집 절도사건, 옷 로비사건 등 DJ정권의 총체적 부패에 대해 선봉장을 맡아 국민들의 궁금증을 해소 해주었다.
그런 이재오의 국정감사 성적표 또한 놀라웠다. 그는 15대 교육위원을 맡아 내리 3년간 의원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여야의원의 서로 뽑은 국감인물, 언론사 시민단체가 뽑은 우수의원의 명단에도 빠짐없이 들어갔다. 그는 교실붕괴의 현실과 원인을 지적하고 교육기자재 납품의 비리, 급식과 입시문제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대안을 제시하며 차원 높은 국정감사의 케이스를 보여줬다..
그는 민생입안에도 적극적이었다. 점포 임차인(영세상인)도 주택 임차인과 마찬가지로 그 권리가 최대한 보호돼야 한다는 내용의 ‘점포임대차보호법’을 발의한 사람도 이재오다. 또 외국인노동자보호법, 재래시장활성화법, 상하수도 오염문제, 하수처리, 대기오염, 청소년 유해업소대책, 불량식품단속, 다중이용시설물 안전 검검 등 생활에 필요한 정치를 위해 이재오는 발로 뛰었다. 그는 입법베스트 TOP20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