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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작성일 : 14-07-25 14:37
유병언과 인생무상
 글쓴이 : 휘모리
조회 : 1,381  
흔히 집 밖에서 숨을 거둔 이를 보며 '객사'했다고 표현한다.  객사(客死)란 '객지에서 죽음'이라고 명시돼 있다. 유병언이 아무리 전라도 근거지에 은신했었다쳐도,그의 고향은 경북이고 노지에서 발견됐으므로 '불귀의 객'이된 셈이다. 타살이냐 자살이냐 아니면 자연사냐는 의문은 뒤로 하고 말이다.
 
한술 더 떠 유병언의 시신 상태는 할 말을 잃게 한다. 오늘 국과수 감정 결과에서 보듯 시신의 부패 정도가 심해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덥고 습한 날씨를 감안해도 상당 기간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오랜기간 들짐승의 먹이로까지 방치됐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가!
 
춘추전국시대의 오패왕(五覇王)중 으뜸이라는 제환공의 말년 또한 유병언 저리가라다. 제환공은 패왕의 자리에 오른 뒤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소집해 회의를 여는 등 제나라를 초강대국 반열에 올린 명군(名君)이다.
 
헌데 제환공은 훗말 제갈량조차 롤모델로 삼았던 관중의 조언을 무시하고 역아,수조,개방이라는 간신배를 가까이해 감금 상태로 숨을 거둔 뒤 67일 만에야 장례가 치뤄졌다. 시신이 67일간 방치 되었으니 악취는 물론이고 구더기와 벌레가 얼마나 많았겠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물론 유병언을 어딜 감히 제환공과 비교하겠나! 안다. 다만 그와 제환공의 죽음이 상당히 흡사한 건 사실이다. 측근에게 배신(?)당한 면이나 제환공처럼 타살은 아니더라도 방치돼 숨을 거둔 점은 유병언에게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반길 수 있는 사람은 한정돼 있다. 요즘이야 가족 분만이 보편화 돼 친부도 맞이할 수 있지만 과거엔 모친 등 일부 가족과 산파 외에는 누구도 산모를 수발할 수 없었다. 반면 임종 직전 엔 가족외 가까운 지인도 함께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임종을 지키지 못한 걸 최악의 불효 중 하나라고 하겠나. 그만큼 떠나보낼때 많은 이들이 함께해 주는 것이 축복인 셈이다.
 
허나 제환공도 그렇지만 유병언 또한 많은 자식과 배우자를 뒤로 하고 노지에서 홀로(?) 숨을 거뒀다. 이 모든 게 그의 업보지만 끈질기게 자수를 권한 측근만 있었더라도 이같이 비극적인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의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천하의 국과수조차 사인을 판명하기 어렵다는 유병언의 최후를 보노라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말이 떠오른다.
 
 
<휘모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07-25 23:12:37 토론방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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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 14-07-25 15:48
답변  
유병언의 최후가 참으로 처량합니다

그래도 교주인데,, 그렇게 가지말고 좀더 당당하게 갈 수는 없었는지...

휘모리님, 정말 오래간만 입니다. 앞으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
휘모리 14-07-25 16:14
답변  
회장님 반갑습니다. 더운 날씨에 강녕하신지요. 언제나 반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분발하겠습니다. ^^;;

*부회장님 반갑습니다~
bluma 14-07-25 19:12
답변  
깜짝 놀랐네~ 이게 누구신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렇지 이렇게 무심할수가..
자주 뵙시다. 휘모리님~
죽었다는 것만 확인되었을 뿐 타살인지, 자살인지 쪽팔려서
아래 것들레게 죽여달라고 부탁을 한건지 아직은 오리무중입니다.
사건 자체를 은폐하기 위한 모처의 계획된 작품일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