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 2000년~2004년) 원내사령탑 원내총무 이재오
2000년 사무부총장, 2001년 원내총부, 2002년 대북비밀송금진상조사위원, 김대업 정치공작진상조사단장, 서울시직무인수위원장, 2003년 사무총장, 비상대책위원장 2004년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이재오의 16대 정치활동에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김대중 정권의 권력부패와 부정, 그것을 이어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비리와 국정난맥상을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히려고 노력하였고 야당파괴와 정치공작에 단호하게 맞서 싸웠다. 당 내부적으로는 2003년 대표경선에 출마하여 시대변화에 맞는 한나라당의 변화를 요구하며, 지구당폐지, 후원회 폐지, 정당조직의 봉사조직화, 시민운동조직화 등의 정당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재오는 15대에 이어 16대에서 3년 연속 국감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되었다. 2001년 이후부터는 원내총무, 사무총장 등 당3역을 수행하며 평가에서 제외되었지만, 국감활동은 관례를 깨고 열성적으로 준비하여 매년 국정감사 자료집을 2~3권씩 발표하는 저력을 보였다. 여당의원들은 이재오의 충실한 자료준비와 현장감을 두고 교육위 최고의 위원으로 손꼽았다.
15대 국회에서 100여건이 넘는 법안을 발의해 입법활동 ‘베스트20’에 선정되었던 이재오는 16대 국회에서도 184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또 국회연구단체인 ‘민생정치연구회’활동으로 서민을 위한 입법활동에 주력했다. 영세상인, 운수업계의 생존권을 위해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을 개정하여 백화점, 대형할인점의 무료셔틀버스를 금지시켰고, ‘재래시장활성화법’을 제정해 낙후되는 재래시장의 현대화를 지원하였다.
<원내총무 이재오 무엇을 했나?>
☞ 직선원내총무 압도적당선
2001년 5월 한나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이재오는 재선으로 119명중 75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원내총무를 하는 동안 DJ부패정권의 독선과 전횡을 맨 앞에서 막아내면서 정국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과 권력 실세들이 유착된 부패사건들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이용호 게이트 특검법안을 관철시킴으로서 부패권력을 심판하고 DJ의 두 아들을 사법처리하였다. 야당다운 야당의 진수를 보여주고, 이재오의 강력한 리더십과 투쟁력을 보여주었다. 또, 2001년 9월 3일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안도 결국 통과시켰다.
☞ 일하는 국회, 민생국회 만든 명총무
원내총무 재임기간 동안 과거의 거친 몸싸움이나 날치기 통과는 볼 수 없었다. 3년 동안 표류하던 개협입법인 ‘부패방지법’, ‘돈세탁방지법’ 등을 통과시켰으며 10년이 넘게 제정되지 못하고 있던 영세상인의 숙원법인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이재오 총무가 직접 대표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그리고, 취임이후 변화에 둔감했던 국회에 작지만 눈에 띄는 변화를 이끌어 국회개혁에 앞장섰다. 단상의 총무좌석 단하이동, 5분전 회의장 입장, 크로스보팅, 전자투표제 도입 등을 만들어갔다.
<사무총장 이재오 무엇을 했나?>
☞사무총장 겸 비상대책위원장에 임명
2003년 10월 전격적으로 당 사무총장 겸 비상대책위원장에 임명된 이재오는 취임식에서 당직자들에게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정국을 헤쳐나가야 하고 팔다리가 잘리고 거리에 나가 앉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정치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 특검쟁취 단식. 정국정상화
한나라당은 ‘대선자금은 검찰이, 대통령 측근비리는 특검으로, 여야 정치권은 정치개혁의 길로 하루 빨리 나가야 한다고 처음부터 주장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2/3이 넘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이미 재의결한 것과 같은 특검법을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정국을 벼랑 끝으로 몰았고 결국 야당은 대통령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국정혼란의 책임을 물어 최병렬 대표와 이재오 총장이 단식투쟁에 돌입하였다. 필사즉생의 각오로 10일간의 단식 끝에 209표의 재의결표를 받아내 정국은 정상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