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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History] 
 
작성일 : 13-08-15 11:26
'1. 오늘의 우리는 과거역사의 작품이다.'
 글쓴이 : 김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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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우리가 왜 단순히 흘러간 과거, 케케묵은 역사를 알아야 된단 말인가?
한마디로 뿌리역사는 우리들의 삶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파괴되고 지워지고, 우리들의 의식에서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역사의 큰 틀은 우리들의 삶 속에 분명히 살아있다.
 
역사의 과거와 미래라는 이 우주의 영원한 시간의 물결이라는 것은 매순간 현재화 되는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지금 이 한순간 순간의 현재 의식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의 과거, 그 진실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오늘 이 순간 우리 모두의 삶의 현실을 풍요롭게 하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미래의 진정한 창조적 설계를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과거를 제대로 인식하는 만큼 오늘 이 순간 나의 의식은 깨어나는 것이다.
 
첫째 우리 한국사의 현주소는 일제의 식민사학과 중국의 침략사관, 중화사관에 사로잡혀 우리는 우리 국조와 시원역사를 부정하는 노예사관을 그대로 옹호하고 대변을 하고 있다.
 
둘째는 정신사가 전무하다. 지금은 서양 실증사학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을 늘 떠들어대면서 모든 역사책들이 구석기 신석기로 시작한다. 정신사가 없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자연과 인생을 바라보았는지 실제 아무것도 없다.
 
인류 원형문화의 위대한 지혜의 세계를 보면 지금의 동서 철인이나 역사학자, 종교인들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정신세계에서 살았다. 이것은 동서 태고 역사의 유적지를 가보면 고개 숙여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사례가 있다.
 
셋째는 우리의 시원역사가 터럭 하나 남기지 않고 뿌리가 뽑혀버렸다. 한국사 시원 뿌리가 말살된 5대 역사 조작극이 있는데, 중국에서 두 가지를 조작하고, 일본이 세 가지를 조작 했다.
 
 
중국인들의 역사 기록법
공자가 노나라 24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여 <춘추春秋>로 이름 지었는데, 이 책은 주나라 왕실을 종주로 삼는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그 후 중국 사서들은 이 <춘추>를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삼게 되었는데, 중국 사서의 편찬 원칙은 다음 세 가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요약된다.
 
첫째,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런 일은 감추고(爲國諱恥)
둘째,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尊華攘夷)
셋째,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祥內略外)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의 잘못된 춘추필법을 지적한 것은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그는 [조선사연구초]<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중국 역사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마천을 “공자 춘추의 존화양이,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의 주의를 굳게 지키던 완유頑儒”라고 혹평하였다.
 
각주) ① 위국휘치爲國諱恥: 위국휘치는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성공成公 9년 종에 나오는 “존귀한 사람을 위해 부끄러운 행위를 기록하지 않고, 현자를 위해 잘못을 기록하지 않으며, 어버이를 위해 질병을 기록하지 않는다(爲尊者諱恥, 爲賢者諱過, 爲親者諱疾.)”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이 말의 ‘존자尊者’ 대신에 ‘나라 국國’ 자가 들어간 것이다.
 
② 존화양이尊王攘夷: 존화양이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등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에 근원을 두고 있다. <춘추공양전> 희공 9년 조에서, 제나라 환공이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尊周室, 攘夷狄)” 라고 한 것이 이 말의 시초이다.
 
③ 상내약외祥內略外: 상내약외는 후한 말기 서간徐幹이 그의 저작 <중론中論>에서, “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안(중국)을 상세히 하고 밖(이적夷狄)을 간략히 하며 자신에게는 엄하게 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 하였기 때문에, 노나라에 대해서는 작은 악행도 반드시 기록하였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큰 악행이라야 비로소 기록하였다(孔子之制 <春秋>也, 祥內而略外, 急己而寬人, 故於魯也小惡必書, 於衆國也大惡始筆)”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BC 156년~ BC 87년)의 사관史官 사마천의 불의
한중 고대사를 날조한 기록상의 첫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때의 사관史官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동북아의 한민족 강토로 쳐들어간 한무제가 전쟁에 참패하고 돌아온 시기에, <사기史記>를 저술하였다.
 
[사기史記]는 <오제본기五帝本紀>로 시작한다. 즉 황제헌원의 역사가 <사기史記>의 첫머리요, 중국 역사의 첫머리가 된다. 사마천(司馬 遷, BC 145년~ BC 86년)은 <오제본기>에서 황제 헌원(BC 2692년~ BC 2592년)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간략히 적은 다음, 곧바로 헌원과 치우 사이에 벌어진 탁록대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치우가 난을 일으키며 황제의 명을 듣지 않자, 이에 황제는 제후들로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 기록의 핵심은 ‘금살치우禽殺蚩尤(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 네 글자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지을 때 <상서>, <춘추>, <국어> 등의 고문헌들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서쪽으로는 공동空桐까지, 북쪽으로는 탁록까지,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남쪽으로는 장강과 회수를 건너서까지”라는 그 자신의 말처럼, 현장 답사를 통해 과거 문헌에 대한 사실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서술은 신뢰도가 높을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삼가三家 주석에는 치우천황(BC 2706년~ BC 2598년)에 대해 이와 다른 기술이 보인다. 먼저 <사기집해>에는 “응소應劭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라고 말했다” 고 되어 있다. 천하의 지배자는 황제헌원이 아니라 치우천황이었다는 말이다.
 
치우천황(蚩尤天皇)에 관해 보다 많은 내용을 제공하는 <사기정의>는 ‘치우 군대가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太弩)와 같은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하였다.
 
치우천황(BCE 2706~ BCE2598)의 국사(國師)인 자부선사(紫府禪師)는 황제헌원에게 가르침을 베풀고「삼황내문三皇內文」을 전하고, 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쳐 줌으로써 한족의 황하문명의 뿌리역할을 하였다. 자부선사에게 신교神敎의 대도를 전수받은 황제 헌원은 ‘황노학(黃老學)’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황제헌원이 거기서 어떤 힘을 얻었는지 바로 중화문명의 탄생지 탁록에서 천자天子로 등극을 했다.
 
 
당시 배달국의 국가 통치제도의 기본 조직인 풍백(風伯,입법부)과 우사(雨師,행정부), 운사(雲師,사법부)는 삼백三伯 제도로서 사마천의 사기史記 첫 페이지에 중국의 시조 황제헌원이 운사雲師라는 벼슬을 맡아서 자기의 조정에 있는 여러 행정부 기구에 구름 운雲 자를 놨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 다음에 주곡, 주명, 주병, 주형, 주사라. 이런 오가五加라고 하는 행정부 조직이 있었다. 이것은 지금도 앞으로 미래도 인간 삶의 근본이 되는 주제다. 수 천 년 전에 저런 제도를 시행했었는데, 지금보다도 무지하다, 미개하다, 수준이 떨어진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래 황제헌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을 주군으로 모시고 운사雲師라는 사법부의 수장 노릇을 했는데, 그 주군을 사로잡아 죽였다고, 이게 중국 역사 사마천(BC145~BC86)《사기(史記)》 첫 페이지에 있는 그 불의한 내용이다. 중국 역사는 이렇게 역사의 불의(不義)로 시작하고 있다. 인류사의 역사 불의가 동북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치우천황(BCE 2706~ BCE2598)은 배달문화의 최고 전성기에 도읍을 청구(산동반도)로 옮겼다.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통일하였다.
중국 현지를 가보면 이 치우천황을 어느 정도로 받들고 있는가를 알수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되었다.
 
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兵主)인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낸 후 군사를 일으켜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제祭를 올렸다.
 
우리가 오자병법이라던지, 손자병법은 알고 있지만 모든 병법의 태조太祖는 모르고 있다. 그 병법의 태조가 바로 치우천황이다. 소위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치우천황의 성씨는 강姜씨다. 그 후에 강태공을 병법의 중시조라고 하는데, 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치우천황에게 천제를 올리고서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을 했다.
 
그렇다면 배달국 14세 치우천황(BC 2706~ BC 2598)과 황제헌원(BC 2692~ BC 2592)의 관계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한족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 치우천황을 꺾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군사를 일으키자, 치우천황이 10년 탁록대전 끝에 그의 무릎을 꿇리고 제후로 삼은 것이 사건의 진실이다. 사마천이 서술한 ‘금살치우禽殺蚩尤’는 역사적 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한 것이다.
 
 
사마천은 왜 굳이 역사의 진실을 뒤집어 기술해야 했을까? 그것은 중국 역사의 시조인 황제헌원을 천자天子, 즉 동북아의 주도권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황제헌원이 천자가 되면, 중국은 그 출발부터 천자天子의 나라가 된다. 중국을 처음부터 동북아의 중심 나라였던 것으로 못 박기 위해 금살치우(禽殺蚩尤)가 필요했던 것이다.
 
치우천황의 군대의 무기에 대해 제(齊)나라의 명재상인 관중(管仲?~ BC 645)은 “갈로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에는 철이 섞여 있다. 치우가 이를 받아 제련하여 칼, 갑옷, 창 등을 만들었다.(葛盧之山發而出水, 金從之, 送尤受而制之以爲劍鎧矛戟.)”라고 서술한다.
 
중국 사서가 이렇게 치우천황의 무기를 세밀히 묘사한 것은, 헌원의 군대는 그만한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음을 은연중에 고백하는 것이다. 당시 치우천황은 동북아에서 가장 먼저 청동 무기를 썼으며 동북아 금속 문명의 선진 주자였다.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14~231쪽.
 
치우천황에 대한 진실은 <환단고기> 외에 <규원사화>에서도 파악된다. <규원사화>는 “당시 치우비蚩尤飛가 서둘러 공을 세우려하다가 전사하였는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았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치우비蚩尤飛는 ‘치우비라는 장수’ 또는 ‘치우천황의 부장’ 등으로 해석된다.
 
‘금살치우禽殺蚩尤’라는 역사 조작이 만들어진 데에는 당시 위만정권을 부수고 북부여를 넘보았던 한무제의 패배도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동방 한민족을 예로부터 중국의 제후국 백성이었던 것으로 만들어 패배의 치욕을 앙갚음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사마천이 조작한 기자조선(箕子朝鮮)
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예濊, 맥貊, 발發, 숙신肅愼, 우이嵎夷, 내이箂夷, 견이畎夷, 서이徐夷, 고죽孤竹, 고이高夷 등과 같은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들이 등장한다. 다른 호칭을 써서 조선이라는 국가 이름 자체를 철저하게 제거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 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썼다.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의한다.
 
《상서대전(尙書大典)》과 <사기史記>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상서대전>은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기자가 무왕의 신하였던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사마천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진실을 고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없었다.
중국 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정도 가면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들판 한가운데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箕子의 묘가 있다. 만일 기자箕子가 정말로 기자조선을 세웠다면 군주의 묘가 어찌 초라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떠나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은 동방 땅에 그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단군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은 한민족사를 그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각주) 기자箕子 : 기자는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당시 상나라의 삼현三賢이었다.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에게 정치를 간하다가 사형되었고, 미자는 비간의 죽음을 보고 멀리 도망쳤다. 기자箕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 감금되었다.
 
기자조선(箕子朝鮮):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이 날조한 기자조선을 한민족사의 뿌리로 여기고 기자箕子를 은인恩人으로 받들었다. 기자는 고조선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없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箕子의 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기자箕子에 대한 진실은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단군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단군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가 고향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삼조당(三朝堂)의 치우천왕
탁록에는 중국의 위대한 세 조상을 모신 삼조당三朝堂이 있다. 한민족의 조상인 염제 신농씨와 치우천황이 중국 역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 헌원과 함께 모셔져 있다. 높이가 무려 5.5m나 되는 거대한 세 상像으로 황제 헌원이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좌우에 두 분이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곳 내부 벽화는 치우천황을 중국 역사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헌원과 맞서 싸우는 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의도에서 억지로 치우를 중국인의 조상으로 만들어 삼조당三朝堂에 앉혔지만, 그들 마음속의 치우는 결코 중국인의 조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문시조(人文始祖) 태호 복희(太昊 伏羲, BCE 3528~ BCE 3413)
치우천황과 더불어 배달시대의 또 다른 제왕인 태호 복희씨에 대해서는 중국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가?
태호복희씨는 배달국 5세 태우의(BCE 3511~ BCE 3419) 환웅천황의 12번 째 막내 아들이다. 태호 복희씨는 팔괘의 창시자로서 대한민국의 태극기의 시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희씨를 모신 사당이 중국 내 도처에 있다. 그 가운데 최근에 크게 증축된 하남성 회양현의 복희묘가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하여 그곳에는 수많은 방문객이 늘 장사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이 이곳을 유독 부각시키는 데에는 목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이 회양현의 복희 사당을 내세우는 것은, 복희씨의 이동 경로를 변조하여 그를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다 간 완벽한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배달의 신시(백두산)에서 태어나 지금의 산동성 미산현에 묻혔다. 중국에서 가장 최초로 세워진 산동성 미산현의 복희묘가 가장 관리가 허술하다. 산동성에는 복희에 관한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또한 중국 사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도, 복희씨의 후손이 산동성 지역에 널리 퍼져서 활동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즉 대륙의 북쪽에서 아래로 남하하면서 동방 신교문명을 일으켰다.
 
 
20세기 들어서서 유물의 과학적 연대 측정이 가능해진 가운데, 뜻밖에도 중국의 동북방 변방인 요하 지역에서 황하 문명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문명인 홍산문화가 발견되었다.
난처해진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민족 역사관’이라는 절묘한 방안을 내놓았다.
 
이때 가장 문제가 된 중국의 시원을 더 오랜 옛날로 끌어올리기 위해 먼저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시작하여 중국 고대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3대 왕조 하, 상, 주의 연대를 확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신화의 시대로 알려진 삼황오제 시절을 실재한 왕조로 만드는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中華古代文明探源工程’을 2003년부터 진행하였다. 이 공정은 하상주단대공정보다 한 술 더 떠서, 중국 역사를 1만 년 전으로 끌어 올려 중화문명을 ‘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만들기 위한 계책이다.
 
 
이 탐원공정의 일환으로 동방 문명의 주인공인 한민족의 북방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정치 공작을 벌렸으니, 그것이 바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다. 동북공정은 과거 2천여 년 동안 행한 동북아 역사 왜곡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만주와 요동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데 있다. 동북공정에 깔린 중국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인가? 남북한의 통일에 대비하여 동북 3성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근거를 미리 만들어두겠다는 것이다.
 
한국이 통일되더라도 한국의 역사 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한정시키고, 대신 중국이 동북아 전체의 맹주가 되고 더 나아가 미국을 앞지르는 초강대국으로 비상하겠다는 의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21세기의 세계를 중국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2002년부터 7년 동안 우리 한국의 상고 역사를 훔쳐가고 있을 때, 이 땅의 정치가와 현 역사학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식민 사학자들은 대부분 수수방관한 채 ‘한민족과는 무관하다’는 망발을 하였을 뿐이다. 현지를 찾은 몇몇 민족사학자들만이 한민족의 옛 터전을 찾아 중국의 파렴치한 행동을 고발하고 있으나, 그 외침은 광야의 빈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중국역사지도집](1996년)에 나오는 한나라 때의 동북아 지도가 한나라의 국경선이 만리장성을 훨씬 넘어 한반도의 북부 지역까지 뻗어 있다. 중국이 주장하는 잘못된 이 지도가 서양의 역사책에 그대로 실리고 있다.
 
2000년 9월에 하상주단대공정 사업을 완성한 중국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연대를 각각 BCE2070~1600, BCE1600~1046, BCE1046~771년으로 확정하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인물 위만(衛滿)
또 일본 사람들은 우리 조선 역사의 출발을 ‘위만조선’으로 말한다. 조선은 본래 독자적으로 나라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위만조선이 BCE 194년부터이니까, 조선의 역사는 약 2,200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衛滿朝鮮: BC 194년~ BC 108년) 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준왕이 하루아침에 쫓겨나 황해바다를 건너 지금의 금강하구 지역으로 내려왔는데, 그곳에 어래산(御來山)이 있다. 이 분이 지금의 청주 한씨의 시조다.
 
 
단군조선은 신교문화(神敎文化)의 삼신사상(三神思想)을 바탕으로 조화신造化神, 교화신敎化神, 치화신治化神의 원리에 따라 고조선(BC 2333~ BC 238)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진한(辰韓)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은 부단군을 두어 간접 통치를 했다.
 
진한(홍산 적봉 일대), 마한(한반도 일대), 번한(산동반도 일대)의 삼한(三韓)을 22대 색불루(索弗婁,BC 1285~ BC 1238) 단군 때 삼조선 즉,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으로 변경하였다. 위만(BC 194)이 강탈한 땅은 번조선의 부단군 기준(箕準, BC 221~ BC 194)이 통치했던 곳이었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삼조선 중,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番朝鮮: 산동성 일대)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신채호(1880∼1936) 선생은 ‘그것은 우리의 변방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마천의『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1712∼1791)의『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지금의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이야기한다. 천하에 불의한 위만이란 자가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하고 정권을 잡은 것인데, 그가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정신 나간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한 삼국유사
단군왕검이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다스리면서 21세 소태(BC 1337~ BC 1286)단군 때, 쿠테타가 일어나 1048년 동안 나라의 수도를 유지했던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44세 구물(BC 425~ BC 397)단군 때는 수도를 장당경 아사달 시대로 옮겨가면서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진실은 수도 송화강 아사달 1048년 시대와 백악산 아사달 860년 시대를 합하면 이게 1908년이다.
 
단군조선은 44대 구물(BC 425~ BC 397) 단군의 대부여(大夫餘) 이후 마지막 47세 고열가(BC 295~ BC 238)단군까지가 188년이다. 그리고 대부여大夫餘는 BC 232년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로 계승되고, 북부여는 다시 고구려(BC 58년)와 대진국(발해,AD 668년)으로 국통 맥이 이어진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한사군漢四郡’
우리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역사말살의 학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사군漢四郡 대동강설’이다.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 개의 식민 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BC 108년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를 멸하려고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 전쟁 초기에는 우거왕의 일방적인 승리가 이어졌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내부의 반란에 의해 결국 왕검성은 무너지게 된다.
우거의 정권은 조선의 왕위를 찬탈해서 만든 한족 정권이기 때문에, 니계尼谿에서 상相이라는 벼슬을 하던 참參이 주동이 되어 우거를 죽여 버렸다. 그러고서 조선의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나라 군에 대항하여 피 터지는 조선족의 독립전쟁을 한 것이다.
 
 
당시 조선족의 독립운동이 워낙 강력하게 일어나서 그곳에 자기네들의 사군四郡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런데 『三聖記삼성기』 上篇상에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있다. 한 무제가 우거의 왕검성만 정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옛 고조선 지역인 만주의 북부여(BC 239 ~ BC 58)까지 완전히 먹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동방 한민족사에 최대의 위기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 의연히 일어난 구국의 인물이 서압록 위에 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다. 왕대나무에 왕대가 난다고, 진조선(眞朝鮮)의 47대 고열가 단군(BCE 295 ~ BCE 238)의 직계 후손인 고두막한이 나서서 한 무제를 물리쳤다.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한 사마천의『사기』의 내용을 보면 한 무제는 단군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棄市刑, 목을 자르고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마천의 이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패전인 것이다.
 
사마천(BCE 145년~ BCE 86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내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이 있었다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쳤고 한국인은 이것을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다녔다.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연결 고리 북부여北扶餘
단군조선(BC 2333~ BC 238)을 북부여(BC 239~ BC 58)가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北扶餘記」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北扶餘記)」상에 해모수 단군에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BCE 108 ~ BCE 60)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의 첫 번째 인물인 2100년 전, 한나라 무제(BCE 141~BCE 87) 때의 사관, 사마천(司馬 遷, BC 145년~ BC 86년)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史記)]를 편찬했다.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BC 239 ~ BC195)와 주몽(BC58 ~ BC19)은 무려 13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BC59~BC58)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BC 239~ BC 58)는 47세 고열가 단군조선(BC 295~ BC 238)과 고구려(BC 58 ~ AD 668)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한무제를 물리친 후 고두막한高豆莫汗은 졸본에 나라를 열어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동방 신교의 대광명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졸본부여를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바로 동명왕이 고두막한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왜곡되어 지금은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해우루, BC120~ BC87)가 돌아가시고 아우 해부루가 즉위하자 고두막한은 해부루를 동쪽으로 보내고 5세 단군(BCE 108~ BCE 60)으로 등극을 했다. 이로써 북부여의 후기 시대[後北夫餘]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6세 고무서 단군(BCE 59 ~ BCE 58) 때에 이르러 북부여는 막을 내린다.
 
한편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 단군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을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라고 하며,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이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고무서(BCE 59 ~ BCE 58)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북부여의 BCE 58년에 7세 단군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변경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668년에 망했다고 배워왔다. 그러니 고구려 역사는 기껏해야 700년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신라의 고운 최치원의 글을 보면, ‘중국에서도 고구려 역사를 900년으로 알고 있더라’고 했다.
 
광개토태황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還至十七世孫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世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십팔 세(391년)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 하셨다. 고구려왕 계보에 따르면, 1세 고주몽 이래 광개토열제는 19세인데 왜 비문에는 17세손이라고 나오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를 봐야 한다.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夫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하시니...
계해(BCD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주몽이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시니... <삼성기 상>
 
고주몽은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를 올리며 고구려를 건국한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의 기원을 해모수로부터 잡고 있는 것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건국(BCE 239년)을 고구려의 기원으로 잡으면, 멸망 때(668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역년은 907년이 된다.
 
 
고구려가 해모수를 태조로 삼고 있기 때문에, ‘17세손’ 의 문제도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열제가 형제 상속 등을 빼고나면 고주몽의 13세손이라고 한다. 그럼 4세는 어디에서 찾는가? 4세는 해모수 단군과 고주몽의 관계에 있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단군의 현손玄孫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해모수에서 고주몽까지 4세, 고주몽에서 광개토열제까지 13세, 이렇게 하여 해모수에서 광개토열제까지 17세를 전한 것이다. 고구려 역년 900년이나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의 ‘17세손’으로 볼 때, 고구려인들은 북부여 창업자 해모수단군으로부터 그 기원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역사속에 표출된 신교의 造, 敎, 治 삼신사상(三神思想)
하늘은 조화造化를 주장하고, 땅은 교화敎化를 주장하고, 인간은 천지의 꿈과 이상을 이루는 치화治化를 주장하는데, 그것을 자연수를 붙여서 天一, 地一, 太一 천일 지일 태일 문화다. 환국은 조화신의 시대, 배달국은 교화신의 시대, 단군조선은 치화신의 시대다.
 
환국桓國은 삼성조의 첫 시대로‘ 조화신造化神의 신성을 구현한 때’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대자연과 한마음이 되어 천지의 조화기운 속에 살던 시대였다. 전쟁과 폭력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천지의 광명을 직접 체험하며 무병장수하는 신선의 삶을 누렸다. 한마디로 환국은 자연과 인간이 극치의 조화造化를 이룬 시대였다.
 
3,301년의 역사를 7세에 걸쳐 환인천제가 이끌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당시의 장수문화를 대변한다. 이를 7대 왕조사로 보는 것은 태곳적 조화문명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오래도록 사시며[長生久視] 항상 즐거움을 누렸다[恒得快樂]’『 삼성기 상 』
 
도를 깨쳐 장생하시니[得道長生] 온 몸에는 병이 없었다[擧身無病]’『 삼성기 하 』 등의 기록에서도, 환인桓仁의‘ 평균 재위기간 470년’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양 의학서의 고전인『 황제내경』 제1장에 나오는 황제와 기백의 대화에서도 먼 옛날에 누렸던 장수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어찌하여 백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는가?’라는 황제의 질문에 기백이‘ 그들은 천지의 법칙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 구약전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도 노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백 살의 장수를 누렸고,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175세를 살았다.
 
우리나라의 신선 계보를 적은『 청학집』에서 동방 선의 최고最古 조상으로 환인을 지목한 것에서도 환국은 인간이 선仙의 경지에서 살았던 조화시대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서양의 고대문명 연구가들은 인류 역사의 초기를‘ 황금 시대the golden age’라 부른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고대의 황금 시대를 규명해 온 그들은,‘ 금속 무기가 없이 오직 석기만을 쓰던 그 시대 인간들은 전쟁을 꾀하지도 않고, 하늘과 땅에 애정을 듬뿍 쏟으며 살았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원시 샤머니즘을 연구한 독일인 칼바이트H. Kalweit는,“ 먼 옛날은 인간이 행복과 평화 속에 살면서 초자연적인 힘을 쓰던 황금 시대로, 그때 사람들은 별 어려움 없이 신과 소통할 수 있었고, 죽음을 모르고 질병과 고통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살았다”『( Shamans, healers, and medicine men』)라고 말한다.
 
세계의 거석문화를 연구하는 마샬Peter Marshall 또한,“ 거석 유적지가 요새로 쓰인 흔적이 없고 주변에서 무기가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고대 사람들은 평화롭고 창조적인 문명의 황금시대를 누렸다”『( 유럽의 잃어버린 문명』)라고 하였다.
 
태고시대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하늘과 직접 소통하며 천지광명 속에 살면서 무병장수를 누리는 신선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배달국 시대는 교화敎化의 시대로서 초대 거발환(BC 3897년~ BC 3804년) 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BC 3898년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했는데,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鹿圖)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단군조선에서는 삼신문화의 성숙과 역사의 제도 속에서 완성된 것은 치화治化의 시대로서 나라를 셋으로 나눠 다스렸다. 단군세기에 보면 단군 왕검은 신묘辛卯(BC 2370)년 5월 2일 날 태어나 무진戊辰(BC 2333)년 38세에 등극을 하고, 50년 되던 BC 2284년 정사년(丁巳年) 2월 17일에 동북아에 대홍수가 났다.
 
그걸 위해서 천지에 기도한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塹城壇)에서의 천제(天祭)는 근세조선에 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강점기로부터 천제(天祭)는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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